프롤로그
지금은 역사 속 한 페이지로 기술되고 있는 IMF, 그 시절은 10대 이상의 나이에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차이는 있겠지만 참혹했던 사회 분위기를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을 겁니다. 조그만 상자를 들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그리고 간간이 들려와서 무감각해지기까지 했던 자살 이야기...
IMF의 기억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잊혀지지 않는 상처로 무의식 속에 남아 있습니다.
97년 IMF 사태는 비단 한국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시작은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이 말려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IMF 사태를 배경으로 두 친구의 우정에서 비롯된 시작과 대물임을 그린 태국 영화 싸반(Puen Tee Raluek, 영문명 the promise), 그래서 글쓴이에게는 더욱 공감이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평을 작성하는데 스포일러와 결론이 제시됩니다. 공포 스릴러 영화인만큼 약간의 스포일러는 영화를 보는데 크게 지장을 주진 않을 것 같지만 결론은 영화를 안 본 사람이라면 감상하고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에 결론 부분은 표시를 해두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시간 동안 영화 전개에 대한 평가
1.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
남부러울 것 없는 즐거운 학창 생활을 즐기던 중산층 중고생 '보움'과 '이브'는 15세가 되던 해 1997년 태국에 몰아닥친 IMF 경제위기로 인해 부모님의 사업이 파산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누려왔던 삶과는 다른 경제적 궁핍 속에서 가족과 갈등마저 심화되던 보움과 이브는 부모님이 짓다 만 사톤 타워에서 동반 자산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먼저 자살을 택한 이브의 죽음 앞에 갑작스러운 공포를 느낀 보움은 서서히 식어가는 이브의 시체를 앞에 두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선택을 합니다.
그로부터 시간은 20년이 흐른 2017년, 아버지가 남긴 사톤 타워를 기반으로 다시 사업을 재개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 보움은 딸과 함께 사업차 타워를 다시 방문하게 되고 20년 전 그 자살 사건이 발생했던 장소에서 이브의 삐삐를 주어온 딸 '벨'은 이후 심각한 몽유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의사들이 내린 몽유병 진단과 달리 보움은 딸에게 이브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브가 복수를 계획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2. 영화 속 이브의 정체는?
15살이 되기 일주일이 채 남지 않은 딸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 보움과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상황이 만들어낸 적개심이 저주로 남은 이브와의 필사적인 사투가 영화를 전개해 나가는 주요 서사입니다. 영화의 단편적인 전개로만 봤을 땐 이브의 존재는 악령이고 보움의 딸 벨은 이브의 영혼에 빙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을 볼 수 있는 아이의 절규, 갑작스럽게 꺼지는 전조등 등의 설정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브의 악령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게끔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이브는 한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긴장감을 만드는 모든 상황은 보움의 딸 벨이 현실 속 몽유병이 발작한 상태에서 행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정보는 이미 현실 속 타워에서 그리고 보움을 통해 벨이 얻은 상황이고요.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그런 딸의 행동을 이브의 재환이라고 믿는 보움의 시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20년 전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죄책감이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보움에게 타워 방문 후 보이는 딸의 이상 행동에 이브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브의 정체가 복수를 갈구하는 악령일 수도 있지만 강박증에 시달리는 보움이 만들어낸 정신적 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운 점
1. 후반부 지나치게 느려진 호흡과 방향을 상실한 결말
초반의 타당성있는 시작과 몽유병과 연개시킨 이브의 존재 그리고 그로부터 딸을 구해내려고 몸부림치는 엄마의 모습까지 극 중반까지 이야기 전개는 관객의 흥미를 이어가는데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대를 이어온 구원(舊怨), 엄마와 딸의 가족애 그리고 20년만에 반복된 인생의 난관 속 개인의 선택 등 이 모든 것을 30분만 정리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인지 몰라도 영화의 뒷마무리는 진부함 속의 방향 상실로 비판받을 듯합니다.
지금부터 스포일러입니다. 영화를 안 보신 분은 이 부분은 읽지 않아 주셨음 합니다.
벨의 자살 시도와 그로 인한 벨의 코마 상태는 보움이 세상을 살아갈 의지를 상실하게끔 합니다. 사톤 타워에서 그동안 이브에게 가졌던 죄책감을 죽음으로 종결지으려던 보움
그러나 그 순간 들려오는 새집 속 새소리와 새 생명의 움직임에 보움은 우연히 과거 그림 속에 덧입혀진 딸의 흔적을 발견하고 삶의 의지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영화는 코마 상태였던 벨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막을 내립니다.
아쉽습니다. 극작가와 연출자가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알겠습니다. 1997년과 2017년의 20년이란 시간 사이 양끝 대척점에서 97년도 보움의 선택이 자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17년의 보움과 벨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17년 보움의 선택이 스스로 만든 삶의 종료여서는 안된다는 의미는 어쩌면 딸 벨의 입에서도 지속적으로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여하튼 그 의도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 전달을 마무리 단계에서 허겁지겁하려고 하다 보니 너무나 많은 우연이 동시에 겹치고 공포영화가 갑자기 휴머니즘 영화로 바뀐 느낌을 줍니다. 좀 과하게 이야기하면 분명히 스크린은 내렸는데 영화가 끝나지 않고 걷돌아 자리를 떠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른 상황입니다.
2. 여기서도 PPL이?
최근 한국에선 엄청난 비용을 투입한 드라마 지리산의 PPL이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 속 상품 광고가 서사의 흐름을 방해하고 관객이 극을 몰입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는 비판입니다. 여기도 중국 핸드폰 브랜드 '오포'의 PPL이 눈에 띕니다. 사람에 따라선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갑자기 생일날 엄마가 딸에게 선물을 더 마련해 준다는 잘 쓰고 있던 핸드폰 놔두고 전화 올 때 불빛이 들어오는 핸드폰을 사달라는 딸의 대답이 상당히 거슬립니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그렇게 핸드폰 상표를 화면에 보여줘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에필로그
과도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영화의 뒷마무리를 제외하곤 공포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볼만한 영화였다는 생각입니다. 위드코로나 시대, 2년 동안 쉽지 않았던 영화 관람으로 싸반을 보는 것이 어떨까를 하며, 포스팅을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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