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해외에서는 조폭, 깡패, 범죄, 폭력 등과 관련된 영화를 하나의 장르로서 '르 누아르'라고 지칭합니다. '르 누아르'란 '검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누아르(Noir)와 관사 르(Le)로 구성된 단어로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에서 최초 시작되었고 할리우드에서는 50~60년대,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80~90년대 홍콩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한동안 하나의 장르로 대중들에게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르는 2000년 초반부터 한동안 큰 인기를 구가하다 대략 10년 정도 지난 2010년 이후 이 위세가 크게 감소하여 극장가에서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더니 코로나 시대에는 거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한국의 르누아르 영화가 특히나 조직 폭력배와 관련되어 있는데 대부분 이런 영화의 결말이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소멸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일반 대중에게 일시적일지는 몰라도 지속적으로 호흥을 받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21년 가을 우연히 눈에 띈 '강릉',
분명 결말이 맘에 들지 않겠지만 오랜만에 유오성과 장혁의 연기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던 강릉이라는 지역적 배경이 흥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포스팅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리 영화를 본 입장에서 영화의 줄거리가 상당히 단조로워 스포일러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듯 합니다만 그래도 혹여 결말까지 알고 싶지 않다는 분은 저의 다른 블로그 감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영화의 줄거리
강릉의 최대 폭력배 조직의 파벌 보스인 '길석(유오성)', 영화상 그는 이 세계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의리를 중시하고 이미 구축된 질서를 존중하는 까닭에 주변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역으로 그려집니다 뿐만 아니라 조직 내 최대 보스인 오 회장으로부터 능력까지 인정받아 강릉 최대 리조트 소유 및 관리를 책임지는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그는 주변으로부터 직간접적인 견제를 받기에 이릅니다.
한편, 서울에서 조직의 리더를 제거하고 리조트 개발 지분을 갈취한 '민석(장혁)'은 이 사업에 눈독을 들이게 됩니다. 당연히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길석과 민석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두 조직 간의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갑작스러운 기습과 그 사이에 스며든 조직원의 배신 그리고 여기에 대한 복수, 영화는 정해진 결말로 흘러갑니다.
좀 과한 느낌이지만 그럭저럭 볼만한 연기, 하지만 20년동안 발전이 없는 진부한 이야기 전개
배우 유오성은 이미 '비트', '친구' 등에서 협객의 성격을 지닌 조직폭력배 연기를 경험하고 이를 잘 소화하였습니다. 볼혹을 넘긴 그런 그가 맡은 비슷한 이 배역을 잘 소화하지 못할 리는 없겠죠. 배우 장혁이 맡은 민석 역은 그간 장혁의 뒤를 쫓아다녔던 비판을 흡수할 정도로 그의 연기와 상당히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인물의 모습에 흠집으로 작용하진 않습니다. 그 외 조역을 맡으신 배우들도 다들 연기파라는 명성에 맞게 맡은 자리에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느낌입니다. 다만 두 배우 모두 오랜만에 맡은 배역에 욕심이 있었는지 캐릭터에 과도하게 몰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길석은 역할의 위상치고 너무 어수룩하고 순진한 모습인 반면, 민석은 냉혹함을 넘어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느낌).
하지만 이야기 부문에서는 실망스럽습니다. '결국은 비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 방식은 20년 전부터 봐왔던 한국형 르 누와르 영화의 짜깁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좀 심하게 묘사하면 그동안 개봉한 영화의 특징적인 부분을 잘라서 배우들 얼굴만 오려 붙여 만든 이야기 같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개가 너무나 진부하고 어디서 한 번쯤 본 듯합니다.
민석은 왜 그렇게 무모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가시지 않는 의문은 민석의 행동이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길석입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의 이미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협객' 모습 그 자체입니다. 스승이자 보스인 오회장을 비롯 윗사람에게 지속적인 존경심을 보여 주면서 아랫사람들에게는 따뜻하지만 위험이 있는 리더로서, 그리고 그쪽 세계에서는 능력 있는 사업가로서 무의미한 폭력을 싫어하는 길석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건달의 모습을 거의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대립하는 역할을 하는 캐릭터, 민석. 그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초반 절대적인 신임(영화 끝마무리에 이것도 허상이었음이 드러납니다만)을 받는 부분만 뺀다면 길석과 완벽하게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인물의 갈등과 거기서 비롯된 행동이 영화의 중반부까지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입니다.
특히, 한 사람으로서 인간적인 면모가 거의 거세당한 듯한 민석의 주도면밀함이 인간적이지만 허술한 길석과 길석이 소속된 조직의 패배와 맞물려 더욱 부각됩니다. 민석은 상대 조직의 보스를 직접 제거하면서도 자신의 책임에서 회피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고 상대편을 급습할 때도 내부 조직원의 배신을 유도할 만큼 매우 명석한 두뇌를 가진 냉혹한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입니다. 영화를 아직보지 않으신 분은 영화를 보시고 나서 읽으시는걸 권장드립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선택한 마지막 행동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연히 영화 구조상 비장미를 강조하면서 마지막 이야기 효과를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목적에서 그랬겠지만 있었던 피신할 기회를 버리고 혼자서 17대 1의 싸움에 무모하게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 중반까지 장혁이 연기한 캐릭터 민석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길석과의 대결씬에서 뜬금없이 자신의 지금 모습이 너의 미래다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던집니다. 주인공은 길석이지만 영화에 대한 관객의 첫인상인 영화의 첫이야기는 민석이 군산 앞바다의 버려진 배안에서 인육을 먹어가면서 생존을 갈구한 존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개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감독이 건달은 현재 우위에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언제든지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전달하고 싶어서일까요? 무언가 중간 내용이 빠져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 너무 극작가 또는 연출가와 배우만이 알고 있는 다른 민석에 대한 내러티브가 있지 않나하는 의구심이 드는 부분입니다.
에필로그
액션은 그냥 볼만 합니다. 너무도 진부하고 단순한 스토리지만 여기서 개똥철학이 나오면 거북할 수도 있는 까닭에 이것이 또 이런 장르의 영화를 볼 때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꺼란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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