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만남
20년이 지난 이후 스스로 만들어낸 인연
옹정제를 향한 '세 번째 만남'은 앞의 경우와 달리 자발성을 띄고 있습니다. 우연히 맡은 강의주제로 강희제와 옹정제의 관계(궁금하신 분들은 '첫 번째 만남'편을 참조하시면 됩니다)를 인문학적으로 고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옹정제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어 오늘 소개할 '옹정제'를 일독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세번째 만남'이란 제목에 당황한 독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의미가 있지만 서평을 작성하는데 큰 의미는 없는 '개인적인' 만남들이라 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옹정제는 2001년에 첫 출간 지금까지 9쇄가 인쇄된 나름 스터디셀러입니다. 척박한 대한민국의 출판 환경에서 대중이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요소가 없는 동아시아사를 주제로 한 저서가 20년 넘게 절판되지 않고 출간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경쟁력이 간접적으로 증명된 셈입니다.
지금은 생존해 계시지 않은 '미야자키 이치사다' 교토대 교수가 저술한 이 책은 확실히 '대가가 대중을 위해' 역사서를 쓴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양은 많지 않지만 일반인도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한 소재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가독성도 좋은 데다 저자가 독자에게 제시하고 싶은 주제를 마지막 단락에 간결하지만 명확하게 제시한 점은 이 책의 빛나는 장점입니다. 여담으로 읽은 역사서 중 이와 비슷한 형태로 역시 제 가슴을 두드린 책은 대만 사학자 레이 황이 저술한 '1587년 만력 15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해'(찾아보니 이미 절판되었네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한번 서평을 만들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를 손꼽고 싶습니다.
저자 미야자키 교수가 묘사한 옹정제의 생활상은 그가 자신의 위치에 충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밤 열시나 열두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네시가 되기 전 일어난다. 깨어 있는 동안은 오로지 정치에 몰두하느라 잠시라도 쉴 틈이 없다
청조가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들은 두 개의 신문화와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중국의 한문화(汉文化)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소개한 서양문화였습니다. 중국 대륙의 원주인인 한족과 다른 이민족으로 서양문화를 한족과 차별화된 수단으로 사용하던 아버지와 달리 옹정제는 철저할 정도로 한문화를 선호했습니다. 시대상으로 봤을 때 인문학을 제외하고 서구의 것이 이미 여러 부문에서 앞서나가 있었지만 철저한 통치를 지상과제로 삼은 옹정제에게 군주제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문화가 훨씬 더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천명(天命)사상이라는 통치이념을 기반으로 황제권을 구축하고 관료 조직을 통제하면서 이 관료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특권계급과 기나긴 정치 투쟁을 진행합니다. 미야자키 교수에 따르면 옹정제에게 있어 황제 이외는 가질 수 없는 특권을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관료와 이를 지원하는 자본가의 결합은 철저하게 타파되어야 할 적폐이었습니다. 옹정제의 치세 13년은 사회 속 깊숙히 뿌리 박힌 기득권과의 숨 막히는 대결의 기간이었으며 반대로 특권층에 의해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던 일반 민중에게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그는 재위기간 내내 가장 효율적이면서 직접적인 관리가 가능한 황제 1인의 독재정치를 추구하였습니다. 사실 옹정제는 처음부터 황위가 내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옹정제에게 황제가 될 기회는 우연히 다가왔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로서 삶에 안주했던 전임자들과 달리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자리에서도 젊은 시절 습관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그는 엘리트 한족 출신이 아니었던 까닭에 중국의 정통 정치체제의 순결성에 더욱 병적으로 집착하였습니다. 이런 출신 배경의 복합적 결합은 그가 전임 한족 왕족 누구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철인이 다스리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지휘체계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1인 독재정치는 개인에겐 정신적, 체력적으로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기득권층에게 진심 어린 협조를 받아내기 어렵고 끊임없는 불만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독재정치 체제는 개인의 투입한 살인적인 노력에 비해 여러 저항요소 때문에 효과성을 담보하기 어렵고 설령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더라도 개인적인 역량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이 단기에 불과한 치명적인 약점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득권과 적당한 타협을 통해 40년 이상의 통치를 가능케 한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성세와 달리 옹정제가 불과 13년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만 황제의 지위를 유지한 주요 원인입니다.
과도한 업무로 개인의 수명은 줄대로 줄고 본인의 사후 다시 기존 시스템으로 되돌 간 상황에서 옹정제 치세의 의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노회 한 학자 미야자키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지적하며 반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만약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옹정제가 없었다면 청조는 중국 왕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폐단에 급속히 노출되어 서구의 침략 전에 이미 명을 다했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사실 옹정제의 철인정치 덕에 청나라는 실질적인 국력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민중의 희생만 따르고 영토 확장 이외 별다른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정복 전쟁은 효율성을 중시한 옹정제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사업이었던 겁니다. 여튼 이덕에 건륭제가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지금의 중국 영토 원형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미야자키 교수는 이런 옹정제의 치세로 대변되는 철인정치가 중국 민중에게 심어준 잘못된 기대감의 역설을 책 말머리에 언급합니다.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국 역사에선 끊임없이 명군이라는 존재가 군주제의 이상과 실행방법을 개선해 나갔고 대중은 점차 그에 대한 신뢰가 쌓여갔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옹정제의 치세는 그 형태의 최정점임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해서 독제체제를 신뢰하게 된 민중은 독재제를 갈구하게 되고 그들의 권리를 스스럼없어 내려놓는 우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 그가 안타까워하는 부분입니다. 옹정제의 정치는 그야말로 선의를 의도했지만 궁극적으로 '악의의 정치'가 귀결된 역설적 상황 그 자체입니다.
첫번째 만남
고등학교 시절 어느 늦은 밤 우연히 시청한 중국 드라마의 한 장면
아들이 아버지를 목졸라 죽이고 유서를 변조하여 황위를 찬탈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던 이 드라마는 군림천하라는 제목으로 1997년 SBS에서 방영했습니다. 얼마나 그 인상이 강렬했으면 24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어린 시절의 기억 어딘가에서 찾아 지금 블로그의 소재로 활용할 정도일까요.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에게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옹정제는 그러나 수험공부보다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던 까닭에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을 뒤로하고 기약 없는 헤어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만남
대학교 1학년 2학기 교양과목 중국의 역사와 인물
'중국의 역사와 인'물은 개인적으로 대학교 4년 동안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수강과목입니다. 비록 전공과 무관한 2학점짜리 교양이었지만 밀레니엄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가을 화, 목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매 시간 시간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시청하는 기분으로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이 과목은 중국 역사 속 중요 인물을 당시 시대적 배경과 함께 재미있게 풀어 설명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중국 마지막 제국이자 근현대사의 길목에 있던 청나라의 전성기를 책임졌던 3황제, 강희제, 옹정제 그리고 건륭제는 앞선 왕조인 명나라의 암군(暗君)들과 극명하게 비교되는 성군(물론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관점에 따라 현대에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긴 합니다)들로서 각각의 개성과 역할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2학기 기말시험에 '옹정주비'의 역할을 논하라는 시험문제 덕에 옹정제는 더욱 기억이 생생합니다.
중국의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당시 한족의 이상향에 집착하였고 그 덕에 다른 한족 출신의 황제들보다 일반 민중에게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었던 인물, 그러나 역설적으로 독재적인 철인정치에 중국 민중을 중독시켜 오늘날 일반 민중에 의한 지배가 낯설게 만든 장본인... 옹정제에 대한 평가는 계속되어야 할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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