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좋은 사람'의 관람은 충동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최근 극장가의 화제작인 '상치'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당기지 않았고 다른 몇몇 한국 작품들도 그렇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미스터리'라는 장르와 '25회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정보가 극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관람 내내 극장 내의 분위기는 답답함, 중압감 그리고 막막함 등 소위 요즘 말로 물없이 고구마 한 5개 정도를 먹은 느낌이었습니다. 아, 영화의 전개가 답답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보다 영화의 전개 속도는 매우 빨라 상영 시간 내내 관객이 다른 생각을 가질 여유를 주진 않았습니다. 전체적인 영화 분위기가 제목과는 '반어'적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 관람 후엔 그 답답함과 중압감 등이 저에게 새로운 질문으로 환원되는 참 묘한 영화입니다.
당신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좋은 사람입니까? 혹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스포일러가....뭐 약간 있습니다. 근데 이 내용을 알아도 이 영화에서 가져갈 것은 참 많습니다.
영화는 몇일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넓지 않은 제한된 공간, 학교, 집, 길거리, 병원에서 벌어진 2가지 사건, 반에서 일어난 지갑 도난과 딸의 교통사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고등학교 교사인 경석(김태훈 역)의 반에서 의문의 지갑 도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학생들의 양심을 신뢰한 경석의 기대와 달리 범인은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경석은 자신이 잃어버린 돈을 보상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연한 제보로 인해 같은 반 학생인 세익(이효제 역)이 범인으로 지목됩니다. 모든 상황이 그를 지목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코 범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세익 앞에 경석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의 연무가 피어오릅니다.
한편, 별거중(이 부분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화 설정상 별거 중인 듯싶은데 이혼일 수도 있습니다)인 부인의 갑작스러운 부탁으로 딸을 며칠 맡게 된 경석은 잠깐의 방심으로 딸이 교통사고를 막지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주변의 질책과 깊은 자책감 그리고 몇몇 정황 때문에 생겨난 의구심으로 정신적 방황의 심연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영화 좋은 사람의 주인공인 교사 경석과 학생 세익 모두 설정상 악의가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선의지를 가지고 그렇게 되고자 행동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그들을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한 곳으로 몰아갑니다.
교사 경석은 고지식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려 노력합니다. 실망스러운 제자들의 행동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알아주는 않는 제자의 무례함 앞에서도, 교육자로서 자세를 잃지 않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심지어 교통사고가 발생한 원인은 생각지도 않은 체 무조건 남편의 책임만을 몰아세우는 아내 앞에서조차 그의 모습은 답답할 정도입니다. 유일하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상대는 영화 초반에 딸 윤희이며, 이는 대화의 상대방이 아이인 까닭에 외면적인 가식보단 본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대상이라 그런 듯 싶습니다.
학생 세익도 참 답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어릴 적 이혼한 부모 때문에 큰어머니 집에 얹혀살고 있기에 그는 세상과의 접촉은 최대한 자제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그 안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은 그를 도둑으로 의심받는 상황에 놓이게 하고 한 순간의 실수(영화의 스포이기 때문에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습니다)를 만회하고자 한 선행이 그를 교통사고를 발생시킨 범인으로 의심받게 만들었습니다. 이 부조리한 상황 앞에 그의 거친 해명과 미숙한 행동은 세익을 더욱 곤란스러운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영화 막바지에 두 명의 주인공은 '자신을 숨긴'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짐으로써, 즉,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해지는 그 순간 진정한 의미의 좋은 사람으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딸과의 이별하고 자신이 머물렀던 교정을 떠나는 모습'에서, '오랜 시간 후 등교 이건만 여전히 나를 본체만체하는 학우들 속'에서 경석과 세익의 앞길은 결코 순탄하지만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겨울 잿빛 배경 속에 살짝 비추는 봄기운을 통해 영화는 어제와 달라진 좋은 사람인 그들에게 그래도 더 나을 가능성이 있길 바라는 관객들의 기대를 조금이나마 쓰다듬으면서 마무리됩니다.
쓰다 보니 영화의 중요한 이야기는 다해버린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스스로 평을 거침없이 쓴 이유는 이 영화가 일 개인의 감상평 정도로 마무리될 작은 그릇의 작품이 아님에 있습니다. 영화 좋은 사람은 부담 없는 미스터리를 기대한 관객에게도, 실존주의를 대중문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찾던 학자에게도 그리고 글쓴이가 생각지 못한 목적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참 많은 것을 선사해주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나의 과거 또는 현재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켜보던 제삼자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한번 관람하는 것을 추천하며 오늘 포스팅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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