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망치를 들고 허공에 휘두르는 어수룩해 보이는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와 그것을 조용히 관객들에게 비추는 카메라 앵글, 영화 실종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다소 기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장면을 지나면 잠시 뒤 차가운 밤거리를 비추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도심거리를 조금 왜소해 보이는 여중생이 뛰어가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영화 실종에서 제목은 일견 주인공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포털상 영화의 소개 또한 이 부분에 충실합니다. 초반 내용 전개도 실종된 아버지 '사토시'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딸 '카에다'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편한 전개를 어느 순간 버리고 관객들에게 숨겨진 다른 이야기를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
3년간의 연애와 14년간의 결혼 생활 속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내의 루게릭 병 앞에서 끝없는 무력감을 느끼고 있던 사토시. 그런 그의 어두운 환경에 조용히 스며든 연쇄 살인마, 그는 이런 환경을 이용하여 사토시를 유혹, 자신의 살인 계획과 행동에 그를 조용히 편입시킵니다.
사회적 가치와는 다소 어긋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힘든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엉뚱한 생각으로 연쇄 살인마와 동행을 택한 사토시는 점차 죄의식을 잃고 돈에 중독되어 갑니다. 그러던 중 사토시는 우연한 계기로 연쇄 살인마가 결코 자신과 같이 함께 할 수 없는 부류라는걸 깨닫고 모종의 계획을 향해 자신을 스스로 실종시키게 됩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불편한 시선들
익숙한 초반부를 지나 딸의 고분고투를 통해 실종된 아버지의 흔적이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다소 익숙하지 않은 일본의 뒷골목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 바로 어제 밤까지 같이 잠자리에 들었던 아버지가 종적을 감추었는데 당황한 딸 앞에서 아무 근거 없이 '빚 때문에 가출했다'라고 확정 짓는 경찰
● 불치병으로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바라고 있는 환자와 그를 힘겹게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주변 사람, 그리고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하는 사회보장 시스템
● 우연한 계기로 촉발된 경제적 몰락 이후 재기는커녕 빚더미 속에서 허우적 될 수밖에 없는 가장과 그의 가족
● 젊은 온기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속절없는 시간만 보내면서 자리만 지키고 있는 노인들과 무너져 가는 지역 커뮤니티
● 그리고 삶의 종식을 통해서만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과 그것을 악용하는 사이코패스까지
어리숙하지만 딸에게만큼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아버지를 찾고자 고분고투하는 카에다를 제외하고 영화 속 등장인물 그 누구도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잠시나마 착해 보였던 사토시조차 영화 중반부터 관객의 첫인상이 그다지 옳지 않았다는 듯한 행동을 합니다.
영화는 다소 느린 전개 속에서 관객들에게 자신의 일이 아니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엮어 가면서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하나씩 보여줌 속에 관객들이 놓친 반전을 제시합니다. 이 영화의 매력이자 영리한 점입니다.
영화의 결말
영화는 반전과 반전, 반전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와 딸이 낯선 섬에서 우연히 조우하고 아버지와 딸이 사토시의 아내이자 카나에의 엄마와 함께 꿈꾸었던 탁구장을 다시 개장하는 모습을 잠정적인 결말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연쇄살인마의 행동을 지켜보고 그에게서 사악함을 배운 사토시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제2의 연쇄살인마가 되는 길을 답습합니다. 결국 영화는 어리지만 가장 성숙한 카나에가 가슴 아프지만 옳은 길을 제시하는 식으로 마무리됩니다.
에필로그
영화의 제목 '실종'은 단순히 아버지의 사라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들, 국민의 생명을 도외시하는 공무원, 제정 당시 취지를 벗어나 수혜자의 의지를 고려치 않는 사회보장 시스템, 한때 행복했지만 지금은 재기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가정,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서 그저 자신의 위치만 지키고 있는 노인들 그리고 원래의 순수함을 잃고 금전 앞에 윤리의식마저 상실한 사람들까지...
영화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실종된 것들을 지적하고 카나에로 상징되는 순수함을 통해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딸이 엄마와 자신을 절대로 잊지 말고 '영원히 안녕(사요나라)'라고 아빠에게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영화를 본지 사흘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등장인물들의 다소 기괴한 행동이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선 다소 지루한 전개가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점이 이 영화의 몇 안 되는 단점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올해 본 제대로 된 스릴러 영화, 죽지 않고 귀환한 제대로 된 일본 영화 '실종', 흥행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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