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폰(The Black phone) -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친 이에게 들려온 시공간을 뛰어넘은 목소리 줄거리, 결말 그리고 감상평
프롤로그
우연한 기회에 선 관람했던 영화 '블랙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인 공포물에 끌려 관람했지만 정말 많은 것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번 글에는 아래 여럿 스포가 있습니다. 스포 없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은 조용히 지나치시길 권장드립니다.
영화의 시작, 70년대 말을 살아간 미국인들의 향수 속 밝지 않은 가정사
영화의 이야기는 70년대 후반 미국 중서부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이 영화는 시작 화면과 과거씬 곳곳 필름으로 촬영한 듯한 영상을 제시하여 관객이 마치 70년대 말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 한가운데 서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실종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중심이 된 이 영화에서 주인공 피니와 그의 여동생 그웬은 얼핏 우리가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학생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편부모 가정에서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웬은 꿈속에서 과거나 현실에 발생한 장면을 볼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은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듯한 이 설정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영화 속에서 아버지에게 더 심한 학대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딸이 주목받는 현실이 매우 거북했고 예상컨데 죽은 아내가 생각나는 상황도 마주치기 싫었겠죠.
한편 주인공 피니는 학교 야구팀 투수로 활약하고 과학 분야에 흥미도 있는 우수한 학생같지만 가정환경 때문인지 우리의 예상과 달리 극초반 내내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입니다. 심지어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당한 학폭에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않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오히려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저돌적이면서 맹렬한 성격의 동생 그웬이 코피까지 흘려가며 이런 오빠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별로 달가워보이지 않는 남매의 환경에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또래 아이들의 실종 사건까지, 영화가 보여주는 초반 전개는 보는 이들의 마음과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주인공 피니가 연쇄 아동 납치범 그래버에게 납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장면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닫힌 공간에서 계속 걸려오는 의문의 전화
영화의 중반부, 배경은 그래버에게 납치된 피니가 갇힌 어느 가정집의 지하입니다.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피니는 납치범 그래버와 자신의 인신 구속에 대한 밀땅을 통해 그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래버라는 인물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인물입니다.
항상 등장 시 괴이한 가면을 써서 자신의 표정을 읽을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언행 또한 피해자 입장에서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물론 피니의 인신 구속이 풀려난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닫혀 더 이상 탈출의 희망이 없는 그때, 지니에게 갑작스럽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물리적으론 절대 걸려올 수도, 울릴 수 없는 벨소리와 함께...
전화를 건 발신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모두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지금 피니가 있는 공간에서 어떻게 그래버에게 당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만의 목적 때문에 전화 넘어 장소에서 피니에게 전화 넘어 조언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들려오는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목소리
주인공 피니는 납치되었던 발신자들의 도움을 통해 그래버를 이겨내고 지하실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사실 이렇게 줄거리만 놓고 보면 어떤 측면에선 상당히 싱거운 영화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납치 -->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의 도움 --> 이를 활용한 주인공의 위기극복
특히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부터의 도움에서 영화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하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인간인 우리, 나아가 인류에 대한 작은 은유라고 본다면 이것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현재적인 존재입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미래에 '내가 생각하는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라고 예측하거나 희망할 뿐이죠. 그러다 종종 전혀 예상치 못했거나 예상과 상반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사람에 따라선 이런 상황을 '위기', '위험', '리스크' 그리고 좀 철학적으론 '부조리' 등 여러 표현으로 바꿔 부르기도 합니다.
막상 이런 위기, 부조리의 상황에 닥쳤을 때 대부분의 우리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면 좌절감을 느끼거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지 원인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개인에게 약간의 위안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상황 자체가 해소된 것은 아니며, 상황을 합리화하기 위해 찾아낸 원인 또한 사실 진정한 원인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주인공 피니가 그래버에게 납치된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조금 과장하면 학교에 잘 다니고 사회에 크게 저항하지도 않는,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착한 학생입니다. 그런데 왜 납치되었을까요? 영화에서는 납치의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납치범 그래버가 오랫동안 피니를 관찰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하필 납치를 의도한 장소에 피니가 재수 없게 걸어가고 있었을 수도 있죠. '시지프 신화'의 저자 알베르 카뮈는 이런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부조리'라고 합니다.
부조리한 상황은 우리에게 닥친 현재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선택은 이 상황에 손놓고 주어진 흐름에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헤쳐나갈 것인가만 남았습니다. 영화 블랙폰은 잠시 불합리한 상황에 좌절할 뻔한 주인공 피니가 헤쳐 나가는 모습과 방식을 보여 줍니다. 바로 '블랙폰'을 통해서요.
영화 속 벽면에 걸려진 선이 끊어진 블랙폰에선 물리적으론 어떠한 연락도 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피니는 블랙폰을 통해 사면이 막힌 공간에서 위안을 얻고 위기를 헤쳐나갈 방안과 용기를 얻습니다. 물론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블랙폰에서 들려오는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모두 정답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더욱 큰 절망을 주기도 하지요. 더 부연하자면 희생자들 누구도 그래버를 넘어서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의 조언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은 아니었단 이야기죠. 하지만 모든 희생자의 목소리를 모아 한 단계 한 단계 성숙해져 갔던 피니는 마지막 순간 그래버를 넘어 섭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나아가 인간 그리고 인류에게는 언제든지 부조리한 위기의 순간이 닥칠 수 있고 닥쳐왔습니다. 하지만 슬기롭게 그 순간을 이겨낸 자는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조리한 환경 속에서 내 자신을 다잡고 방법을 고안해야 하는 순간에는 부지불식 중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즉, 선은 끊어져 있었지만 과거 인류로부터 지혜와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이 목소리와 지혜 중 일부는 한편으론 지금의 존재에게 해악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 역할을 하는 존재로 작용했다는 것이 이 영화가 그려낸 멋진 부분입니다.
에필로그
이 영화는 포토가 보여주는 강렬한 인상과 자극적인 시놉시스로 인해 소년 납치와 그 과정에서의 인물 간 심리 묘사 그리고 해결 과정의 스릴물 정도로 지나칠만한 작품이 아닙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은유와 상징을 읽을 수 있다면 관람하는 관객에게 참 많은 것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평의 마지막을 카뮤의 시지프스 신화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시지프)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하게 만든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솟아오른다. 은밀하고 무의식적인 부름이며 모든 얼굴의 초대인 그것들은 승리의 필연적인 이면이요 대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