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미니센스(reminiscence) - 현재의 나에게 물었다. "추억에 묻혀 살겠냐고"
레미니센스(reminiscence)는 제 기준으로 봤을 때 고등학교 영어 수준을 넘어서는 단어입니다. 혹시 능률 보카에서 본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학교 와서 VOCA 22,000을 공부할 때 마주쳤던 것으로 '추억'됩니다.
쉬운 단어는 아니지만 어원을 분석해 보면 뜻은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일단 remini는 요즘 중학생도 알 수 있는 remind 의 변형 형태이고 scence는 보다, 즉, see의 명사형으로 볼 수입니다. 정확한 의미를 확인하고자 캠브리지 사전에서 해당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remind - 잊고 있었던 어떤 일을 생각나게 하는 것
scence - 장소, 사건 또는 행동에 대한 장면이나 그림
즉,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장면이나 사건을 기억한다는 의미로 한자로 표현된 우리말로 '지나간 과거, 즉 추억(追憶)을 회상(回想)한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듯싶습니다.
영화 감상평을 적는 공간에 이토록 거창할 정도로 어려운 영어단어를 풀어쓴 이유는 이 어려운 단어보단 좀 더 의역된 좋은 한국어를 내세웠으면 더 많은 국내 관객이 영어권 관객과 유사한 느낌으로 이 영화에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에 있습니다. 한국인에게 직관적으로 와닫지 않는 제목과 SF 장르로 규정된 영화 마케팅이 많은 관객에게 잘못된 기대를 가지게 하거나 이 영화를 그냥 지나치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에서 제목이란 첫인상을 결정하고 연출자가 관객들에게 내세우고 싶은 의미를 함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말이죠.
영화는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 상승 때문에 도시의 절반 정도 잠긴 미래 도시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와 갑자기 떠난 여인(메이: 레베카 퍼거슨)을 찾아 주인공(닉: 휴 잭맨)이 자신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복기하는 과정에서 숨겨진 진실을 하나둘씩 풀어가는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영화는 지구 온난화로 더워진 날씨 탓에 사람들이 낮에는 자고 밤에 활동한다는 특이한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베네치아와 같은 수상도시를 모티브로 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이런 특이한 설정 덕에 밤을 배경으로 한 수상도시 마이애미의 야경이 잊을만하면 화면 가득하였습니다.
영화 속 히로인 메이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되어 들리는 재즈풍 음악은 극장 안 분위기를 한적한 분위기의 바(Bar)로 만들었습니다. 배경 지식 없이 극장을 찾았던 까닭에 연출자가 누구인지 몰랐었는데 여성 감독 리사 조이라고 하더군요. 여성의 감수성이 영화 여러 군데 베여 있습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회상'입니다. 연출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는 여정을 떠나기 앞서 잠깐 배경지식 차원에서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유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은 있었지만 기술의 한계로 인해 오늘날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제대로 연구되고 있는 인체의 분야가 바로 '뇌'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모든 인식은 뇌의 작용에서 기인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생물학적인 차원을 넘어 즐거움, 슬픔, 분노, 사랑, 미움, 고마움 그리고 그리움 등 그 인간이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과학에서는 뇌의 생물학적 행동으로 야기되는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억, 우리가 추억이라고 부르는 즐거웠던 순간들을 쫓아가 다시 되돌리는 과정도 엄밀하게 말하면 뇌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추억을 되새기는 행동만큼이나 쓸모없는 행위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더 생산적으로 부분으로 가야 할 많은 에너지를 결코 현실화될 가능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지금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더 증폭시킬 모르는 행위에 사용하는 것이 바로 추억의 회상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연출자도 이 부분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암울한 현실 속 미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을 때 사람들은 가장 찾고 싶은 도피처가 추억이지만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 인간에게 그 도피처에 집착하는 것은 현실과 미래에 대한 포기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진실은 과거보다 더 중독적인 것은 없다는 점입니다. 누가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재회하고 싶지 않을까요? 누가 자신의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까요? 하지만 기억은, 심지어 좋은 것조차도 매우 강렬한 식성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을 잠식할 수 있어요.
[출처] 영화 레미니센스
그럼에도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요? 결코 현실에서는 아름다운 결말이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즐거웠던 순간이 더욱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역설이 있지 않을까요? 신은 왜 인간에게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을까요, 그것도 완전하지 않게 점차 잊혀 가는 형태로....
감독은 영화 말미에 지금을, 그리고 미래를 맞이해야 하는 우리에게 두 가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제시합니다.
불확실하지만 미래 어딘가 즈음에 나를 기다리고 있을 최고의 순간과
슬픈 결말에 도달하기 전 나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었던 그 순간
당신의 가장 최고의 순간은 뒤에 있지 않아요, 에밀리(여러분)
그것들은 당신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어요.
가서 그녀(그것들)를 찾으세요. 여전히 시간이 있어요.
[출처] 영화 레미니센스
메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세요
닉: 이야기? 어떤 이야기를?
메이: 행복한 결말을 가지는 것으로
닉: 행복한 결말이란 없어. 모든 결말은 슬퍼. 심지어 이야기가 행복할 때조차도
메이: 그러면 그러면 중간에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행복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출처] 영화 레미니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