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 탈진실 역사에 바탕한 헐리우드식 영국 국뽕이야기
프롤로그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동명이면서 부제가 다른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프리퀄(오리지널 영화의 선행하는 사건을 다룬 후속편)입니다. 전작이 커다란 스케일을 바탕으로 B급 정서를 제대로 보여준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 작품 또한 큰 줄기에서 비슷할 거라 예상할 수 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소 심각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후술하겠지만 1차 세계대전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에겐 다소 거북할 수 있는 소재이긴 합니다만 할리우드 영화 본연의 흥미거리 또한 풍부한 영화입니다. 미리 나온 혹평 때문에 관람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분들에게 있어 연말 화려한 눈 요깃꺼리를 찾는다면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적십자 활동을 하던 옥스퍼드 가문의 비극에서 시작됩니다. 1902년 남아프리카의 보어인 포로 수용소를 방문하던 옥스퍼드 공작의 아내 애밀리는 그의 남편과 아들 콘래드가 보는 앞에서 보어인 습격대의 총격에 사망하고 이 사건은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만듭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1914년 성년을 불과 1여년 남긴 콘래드와 옥스퍼드 공작은 오스트리아 형가리 제국의 패르티난트 대공 부부를 보호하기 위해 사라예보로 가지만 안타깝게 부자가 보는 앞에서 두 부부는 암살당하고 혼란스럽게 얽혀 있던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됩니다.
아내를 총탄에 먼저 보내고 아들 또한 총알이 빗발치는 참화 속에 밀어넣고 싶지 않은 아버지와 젊은 혈기와 명예욕에 사로 잡혀 있는 아들, 이들은 유럽의 전쟁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이것은 영화 속 이야기 전개의 하나의 분기점을 만들게 됩니다.
제국주의의 끝판왕은 영국이 아니었던가?
이 영화가 '킹스맨'이라는 비밀 첩보 조직이 영국에서 어떻게 창설되었는지 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프리퀄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누구라도 영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1차 세계 대전에 관련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가상으로 이들의 회합이 만들어낸 인류사적 비극을 옥스퍼드 가문으로 대표되는 '지구방위특공대' 대영제국이 힘겹게 막아내는 과정을 장장 2시간 동안 보는 것이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특히, 옥스퍼드 공작은 자신이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을 대상으로 묻힌 피의 무게를 잊지 못해 '너무나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입니다.
비백인 집사, 하녀와 그가 그토록 사랑한 영국 귀족의 상징과도 같은 킹스맨 양복점 그리고 비행기 착륙이 가능할 정도로 넓은 대저택,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제국주의 끝판왕 대영제국의 손꼽히는 명문가 집안이기 때문에 소유가 가능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들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겠지만 옥스퍼드 공작이 꿈꾸고 지키고 싶었던 평화는 수많은 식민지에서 나오는 고혈로 유지되는 대영제국을 중심으로 2등, 3등 열강 국가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에서 지금의 역할에 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저 아래 기저에는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했던 영국과 만년 2등을 탈피하고자 했던 독일과의 대립이 있다는 역사적 사실만 알더라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그리고자 했던 이상향에 그렇게 공감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너무 가상역사극에 흥분하는 것이 아닌지 싶지만...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 속'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제국주의 잉글랜드의 약탈에 분노한 스코틀랜드 출신 귀족이 세계 주요 열강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요 인물을 모아 유럽 간의 전쟁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영국을 파멸시키고자 시도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한 번씩 들어봄직한 러시아의 괴승 '그레고리 라스푸틴', 열강 제국의 황제들 - '조지 5세', '니콜라이 2세', '빌헬름 2세', 러시아 혁명의 주역 '블라디미르 레닌'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그리고 XXX(이 분은 자칫 심각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듯싶어서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등이 등장합니다.
당시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킹스맨이라는 조직의 글로벌 조직력을 설파하기 위한 설정이겠지만 조금만 선을 넘으면 역사왜곡에 가깝습니다. 하기야 요즘 우리나라도 퓨전사극이란 괴이한 이름으로 K-드라마 속 역사왜곡이 영상과 글의 선을 넘고 있습니다만 역사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에겐 자칫 거짓된 픽션이 진실로 인식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대목입니다. 어떤 학자들이 현대사회를 '탈진실 시대(Post-truth era)'라고 명명하는데 진실과 거짓이 혼재된 단계를 넘어 거짓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진실을 덮는 것을 넘어 지우는 상황을 이 영화가 보여주는 듯싶어 씁쓸하기도 합니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지 말고 영화 자체에 집중합시다
앞의 삐딱한 시각을 제외하면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는 할리우드 영화로서 2시간 동안 충분한 볼거리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옥스퍼트 공작과 멋진 칼싸움 대결을 펼친 라스푸틴의 화려한 동작은 20세기 초반 화려한 러시아 귀족 집안의 배경과 잘 어울려 멋진 영상미를 선사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킹스맨 본연의 B급 기질이 사라졌다는 볼멘소리가 있습니다만 충분치는 않겠지만 생뚱맞은 이 칼춤 사위는 사람들의 눈요깃거리를 충족하는데 나름 그 역할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는 글 속 묘사와 동작이 멈춘 사진 속에서만 봐왔던 참호전의 냉혹한 모습을 영상으로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멀다면 멀 수 있지만 사람의 얼굴을 식별할 정도로 거리를 둔 양측의 참호 공방 속에서 빗발치는 총알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 그리고 칠흑 같은 밤 속 총소리를 막기 위해 벌리는 백병전은 영상이 아니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좋은 볼거리였습니다.
에필로그
연말 2편의 기대작 중 1편은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20여 년 전 20대의 젊은이에게 공중에서 일시 정지한 상태로 화면이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영화의 후속을 만날 기대감과 함께 오늘 포스팅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