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지혜의 보고 속에서

일본산고 - 식민지 시절을 경험한 지식인이 지배 집단을 살핀 냉험한 시각

맑은오늘~ 2021. 8. 30.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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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경리와 글쓴이와의 만남은 오랜 과거로부터 시작됩니다. 80년 말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글쓴이에게 주말마다 찾아오는 대하드라마 '토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내용을 모두 개괄하지 못해도 매회 긴장감에 손을 놓지 못했고 그런 경험 때문인지 '서희'와 '길상'이란 이름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90년대 고등학교 때는 현대 한국 문학의 대가인 작가의 위상 때문인지, 문학 교과서를 통해 대학 수학능력시험 문제집을 통해 자주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마주친 일본산고는 박경리 선생이 잡지나 여러 문단에 기고한 글을 모은 산문집으로,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시각을 풀어쓴 '일본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의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고 일본과의 경제적 격차가 급격히 좁혀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일본의 실패'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한 여러 일본론과 달리 이 책은 식민지 시절부터 일본 국력이 최전성기에 이르렀던 때에 국가로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본질과 특성 그리고 문제점을 그들의 역사, 문학의 분석을 통해 그리고 식자층과의 토론을 통해 매우 날카롭게 지적한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논의의 대상이 유년시절에는 식민지 본국으로서, 그리고 성년 이후에는 모국과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때였던 만큼 사람인 이상 상대에 대한 열등감에 위축될 만도 한데 박경리 선생의 글 속에선 이런 부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가지는 내용의 풍부함은 이런 심리적 극복을 통해 객관적인 제삼자로서 냉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정확하게 분석한 데서 비롯된다는 느낌입니다.

 

 

 

 


책의 분량은 많지 않고 여러 기고들을 모아놓은 탓에 중복된 부분도 군데군데 보입니다. 그렇다고 가볍게 쓰여있는 글이 아닙니다. 앞서 언급한 수많은 일본론들이 정치, 경제, 심리,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을 동원해 분석한 일본의 본모습을 이 작은 책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환경상 제한된 정보와 사람 능력의 한계를 감안할 때 이런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는 일본인의 집단주의에 대하여 박경리 선생은 이들이 이 특징을 활용해 민족의 역량을 한 곳에 모아 지금까지 커다란 발전을 해왔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다른 집단과 비교하여 일본의 경우 집단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과 강자 숭배 그리고 권력에 취약한 특징을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바꾸면 개인과 집단 간의 극단적인 불균형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집단이란 개인들이 필요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만든 조직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우 주객전도가 일어나 오히려 집단의 주체이어야 할 개인이 객체로 변질된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만의 독특한 특성이 나타나는데  박선생은 다른 나라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탐미주의가 일본 문학에 주류가 된 이유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찾고 있습니다. 섞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운 쾌락 등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고 싶은데 굴레, 즉, 집단에 막혀 그럴 수 없는 존재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피 중 하나가 바로 이 탐미주의 추구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극대화되면 자신의 육체를 살인하는 행위, 즉, 자살로까지 이어지는데 일본은 이마저도 미학으로 극찬하는 괴이함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집단이 극단적으로 개인 위에 군림하다 보니 자기가 주체인 개인의 의미가 사라지고 그러나다 보니 개인이 책임 쳐야 할 고통스럽기만 한 삶을 굳이 돌파해나갈 필요성 또는 의지조차 없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게 일본인 개개인의 현실입니다.

 

이런 개인의 왜곡은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에도 당연히 부지불식중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실 삶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아름다움이 부각되는 데칼코마니로서 박경리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삶의 추구는 진실의 추구이고 문화의 시발인 동시에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 박경리 선생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개인들이 삶을 이어갈 의지를 상실하고 허무주의에 빠져 기괴한 쾌락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그 연합체인 조직이 진실을 추구 할리 만무하고 그들에게서 제대로 된 문화가 나온다는 게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로 구성된 역사를 일본인들이 도외시하는 배경이며, 일본인과 그들로 구성된 최상위 조직인 국가 일본이 역사 속에서 교훈을 배우기보단 그때그때 사실을 방편적으로 활용하는데 그치는 이유일 껍니다.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여러 핍박을 받은 한국민 사고체계에선 일본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반성과 이에 근거한 진심어린 사과가 없는 것이 잘 이해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고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반 제국주의 시절의 실책을 인정하는 순간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보상 문제가 뒤따른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한 때 일본 정치권을 중심으로 과거 행위의 반성이라는 모습을 띈 사과의 형식은 있었던 듯싶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그들의 행동을 보면 한국인에게 이는 하기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절 받는 느낌일 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일본 식자층을 비롯하여 대중에 이르기까지 나름 합리적인 모습을 띈 설명부터 적반하장의 혐한까지 말이 많습니다. 

 

  • 죽어서도 여전히 현세에 같이 존재한다고 믿는 일본인에게 조상의 잘못과 자신을 명확히 선긋는 서양인과 같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판하는 자세를 요구하는 게 타당하냐와 같은 문화적 설명에서부터
  • 제국주의 세력 중에서 정복행위에 대하여 제대로 된 사과를 한 나라가 있었냐, 조선은 20세기 일본의 병합된 국가였던 만큼 일본이 일본 국민(조선인)에게 잘못된 행위를 사과하는 게 말이 되겠냐와 같은 국제 정치적인 설명,
  • 그리고 해방이후 전쟁으로 거의 죽을뻔한 국가와 국민에게 호의를 가지고 많은 배려를 해왔고, 경제 발전을 도왔더니 이제는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건방지다는 태도까지

여러 입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곤 있지만 제국주의 행태를 통해 여러 아시아 제국에 끼쳤던 잘못된 행위에 대한 반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사과 또한 상대방에 대한 체면을 위한 가식적인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한국의 지나친 사과 요구에 피로감이 한계에 다다르고 본인들도 인류상 최초로 원폭으로 피폭 경험이 있는 피해자라는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기까지 합니다. 왜 원폭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아직도 독일과 같이 피해국과 진심 어린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지 그 원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현실이 불편하고 짜증 날 뿐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당연합니다. 대다수의 일본인들과 그들로 구성된 일본이라는 집단이 진실의 추구를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할 삶을 추구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겠죠. 저도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박경리 선생의 놀라운 통찰력에 감탄이 멈추질 않습니다.

 

한국인이 쓴 일본론 '일본산고', 타계하신 지 10년이 지나 이제는 한국이 일본을 앞선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늘날, 다시 한번 일본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신다면 어떤 말씀이 있을까 담담한 상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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