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는 빨갱이야? - 이미지의 도상(圖像)적 성격이 기호의 생산과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도상이란 뭔가요? 그리고 이미지와의 관계는?
‘도상’이란 대상체의 특징을 포착하여 그와 닮거나 유사하게 만들어진 기호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의문자인 한자로는 그림을 의미하는 ‘圖’와 형태를 의미하는 ‘像’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도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이 이미지입니다. 퍼스는 이미지를 도상의 하위 개념 중 하나로 보았는데 앞서 살펴본 도상의 정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지가 가진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대상물과의 닮음에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미지는 이미 생성될 때부터 대상물에 대한 유사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강한 도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지의 도상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는 뭐가 있을까요?
한편, 퍼스는 이런 이미지를 포함한 기호를 소비하는 수용자가 그의 개인적 사고과정이나 사회적 환경 등에 따라 원래 의도하고자 한 대상물이나 기의와는 다르게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해석할 가능성이 있음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보여 줬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서울 시청 광장에서 한국팀을 응원하는 관중들을 포착한 사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이에 대한 좋은 예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2002년 당시 젊은이를 주축으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서 한국 축구팀을 상징하던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 경기를 응원하는 장면임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에 대하여 넓은 광장의 질서정연한 모습에 집중한 이는 ‘전 세계를 경악시킨 한국응원단’이라는 평가를, 붉은 장면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이에 대한 문학적 상징을 강조한 이는 ‘벼랑 끝에서 피어난 붉은 꽃’이란 표현을, ‘빨갱이 콤플렉스는 사라졌나’와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연관 짓는 모습 등과 같이 여러 매체를 통해 백가쟁명식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습니다.
사진, 즉 이미지는 자신이 닮고자 하는 대상물을 최대한 카메라에 담는 행위를 통해 작성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응원하는 관중’이라는 현상이 사진으로 포착되어 이를 인화하는 과정에서 ‘왜 사람들이 그 시간 그 현장에서 응원을 하였는지’에 대한 의미는 사라지거나 이미지를 생산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의 의도에 의해 1차적으로 수정, 가공됩니다. 또한 다시 여러 언론매체는 자사의 성향과 이데올로기적 배경에 따라 이를 다르게 해석하여 독자들에게 노출시켰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서 글쓴이는 이를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하여 현재의 ‘나’의 관점에서 ‘이런 배경에서 사진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하는 추론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이미지에 대하여 그를 맞닿는 자가 어느 시점의, 어떤 배경을 가진 누구냐에 따라 그 이미지의 생성에서부터 최종 해석까지 상이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예를 통해 이미지가 도상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기호 생산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레드 콤플렉스'를 언급한 필자의 경우 개인적으로 추론컨데 아래와 같은 중국문화 대혁명의 연상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광장에 모여 있는 붉은 차림을 한 대중은 기존의 사회질서에 불만을 가진 과격분자였는데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이런 장면이 실현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이 사진은 우선적으로 혼돈의 사회를 연상시켰지만 곧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 발생한 인지부조화를 해소코자 '빨갱이 콤플렉스는 사라졌나'라는 새로운 해석을 추가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이념논쟁이 가진 강한 폭발성을 고려한다면 붉은 색의 강조로 인해 이데올로기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기호 생산을 시도하는 이에게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이미지의 도상적 성격이 역사적인 의미를 가졌던 시기 -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
이는 왜 중세 유럽사회에서 이미지 생산이 억압받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답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지하다 싶이 유럽 중세시대는 기독교 사상이 모든 사회적 가치에 최우선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 시대 사회의 지배층이었던 교황을 비롯한 사제 등 성직자들에게 예수를 포함한 기독교 교리는 그들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핵심 요소였던 셈이었습니다. 물론 이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은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시켜주고 권위를 유지, 전파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도상적 성격을 지닌 이미지가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유럽과 북아프리카 등의 여러 민족에서 성직자들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수용될 경우 오히려 심각한 통제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당시 성직자 지배층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초점을 맞춰 성직자를 제외한 다른 계층이 예수와 교리를 이미지화, 즉, 우상화를 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여 결과적으로 종교와 관련된 기호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이미지 생산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가들의 평가입니다.
해당 내용은 아직 공부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퍼스의 기호 사상(민음사)을 참조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혹시 이 책을 보신 분은 알겠지만 관련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정말 잘 읽히지 않는(저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텍스트입니다. 그러나 기호를 학문체계로 정립한 퍼스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하는 분께는 한번쯤 책 페이지라도 보면 어떨까 합니다.